회사소개

“저거 싫어.”

볼을 잔뜩 부풀리며 기분 나빠하는 아리아드.

“그래, 정말 싫군.”

늙은 오크 주술사의 지팡이 끝에서 시작된 검은 마기는 마치 밤이 되어 어둠이 세상을 뒤덮는 것처럼 대지를 어둡게 물들였다.

“아, 아아.”

라미아가 몸을 떨었다. 프라로가 급히 라미아의 손을 잡고 진정시키려고 하지만, 떨림이 멈춰지지 않았다.

늙은 주술사가 수작을 부린 것이 아니었다.

원형으로 퍼져나가는 그의 마기는 오크 요새를 먼저 뒤덮었을 뿐이다.

“제길.”

나는 짧게 분노를 토해냈다.

내게 몬스터의 목숨은 가볍다. 특히 나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한없이 가볍다.

하지만, 제물이 되어 죽어가는 것은 싫다.

차라리 나의 욕망과 그들의 욕망이 서로 부딪혀, 꺾인 쪽이 조각나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차라리 깔끔했다.

“아리아드님, 라미아님을 도와주세요.”

“응. 알았어.”

불쾌함에 화를 내던 아리아드가 프라로의 부탁에 화들짝 움직였다.

여전히 떨고 있는 라미아에게 다가가 꼭 껴안았다.

“미안해요. 라미아님. 저 잠깐 개미 여왕에게 눈을 돌렸지만, 배신한 거 아니에요. 라미아님은 언제나 나의 첫 번째 탈 것입니다. 첫 번째이자, 영원한 저의 탈 것입니다.”

꼭 껴안고 하는 말이 라미아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알 수 없지만, 아리아드의 축복이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힘이든 마법이든 주변에 함께 하는 이의 능력을 올리는 아리아드의 축복은 라미아의 신성까지 증폭시켰다.

“아, 아.”

여전히 신음을 흘렸지만 느낌은 확연하게 달라졌다.

아파하는 소리가 아니라, 미몽에서 깨어나는 소리와 닮았다.

라미아가 자신을 껴안은 아리아드의 손을 잡았다.

괜찮다는 듯이 손을 꾹꾹 눌러주고 나서 아리아드의 겨드랑이에 손을 뻗었다. 익숙하게 들어 올려 자기 등에 아리아드를 태웠다.

“아리아드, 나를 도와줘. 저놈을 용서하고 싶지 않아.”

“응, 혼내줘.”

둘의 모습에 프라로가 한결 편해진 모습으로 윈티와 함께 개미 여왕 위에 탔다.

개미 여왕의 고삐만을 잡은 채 굳어진 디릭크가 눈에 들어왔지만,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멸절자의 대검을 들어 올렸다.

오크를 가두는 양식장에서 제물을 바치는 제단으로 변해버린 오크 요새를 향해 걸었다.

“마왕이여, 그대의 지식은 나의 것이 될 것이다. 우리를 정해진 행동만을 반복하는 꼭두각시로 여긴 탐색자들처럼 내게 녹아내려 나의 지식이 될 것이다.”

“짜증 나는 소리를 하는군.”

대지에 깔린 검은 마기, 그 속에서 뻗어 나올지도 모를 공격을 대비하면서도 늙은 주술사가 하는 말을 기억했다.

탐색자, 오크들을 꼭두각시로 여기는 탐색자.

유저, 오크들을 엔피씨라고 알고 있는 유저.

‘탐색자로부터 얻은 지식에는 마왕이라는 존재가 포함되어 있다.’

어느새 가까워진 대지를 물들인 검은 마기.

머릿속으로 정리를 하면서 대검에 마력을 담았다.

“부서져라.”

대지를 향해 일격을 가했다.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대검으로 일으킨 폭풍이 대지를 갈기갈기 찢었다.

“마왕, 네놈은 결코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하찮군. 스스로 이루는 길을 걷지 못하는 주제에.”

“감히.”

단순한 모욕이 아니었다.

대검에 두른 마력이 오염된 대지에 닿는 순간 나는 검은 마력을 파악했다.

저 늙은 오크 주술사는 스스로 격을 이루어 의지를 외부로 투영해낸 것이 아니었다.

그저 오랜 기간 바쳐왔던 제물이 많을 뿐이었다.

나의 대검이 만든 충격파에 닿지 않은 부분. 오염된 땅이 검은 마기로 꿈틀거렸다.

마치 썩은 늪에서 양서류가 올라오는 것처럼 부글거리더니 기괴한 존재를 토해냈다.

오크처럼 큰 키를 가졌으나 발달된 근육이 없었다. 오크가 자랑스러워하는 근육이 있어야 할 곳에는 진득거리는 점액, 슬라임의 반투명한 덩어리가 엉겨 붙은 채로 꿈틀거렸다.

“으으, 기분 나빠. 뮴.”

아나스타가 투덜거렸지만, 여느 때와 같은 투덜거림일 뿐이었다. 손끝을 바싹 세우고 마력을 투영한 손톱을 준비하는 그녀의 눈은 살기로 번뜩였다.

늙은 오크가 검은 마기로 오염시킨 대지의 모든 곳에서 슬라임에 녹아든 죽은 오크가 일어났다.

요새와 요새 주변의 모든 곳이 몸 일부를 슬라임에게 먹혀버린 오크로 채워졌다.

“전투에서 수는 중요하지.”

나는 나의 뒤를 받치는 모두를 느꼈다.

“하지만, 그 먹혀버린 오크들로 나의 집중력을 흩트리려면, 끊임없이 몰아쳐야 할 거다.”

나의 뒤에서 아나스타와 피리샤, 엘르, 다이나가 미소 지었다. 가름슈가 그들의 뒤에서 나가 병사들의 진형을 견고히 구축했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며 대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검날에 닿은 오크뿐만 아니라 검이 만드는 폭풍에 오크들이 뭉개지고 무너졌다.

바가지로 물을 퍼낸 곳으로 다시 흘러드는 물처럼 다시 채워지는 슬라임에 먹혀버린 오크들.

나는 강력하게 휘두른 만큼 관성이 남아있는 대검을 부드럽고 천천히 수습했다. 먹혀버린 오크들이 빠르게 몰려든다고 해서, 대검을 휘두르는 흐름을 가속할 필요 없었다.

그저 뒤로 한발 물러나 아나스타와 피리샤, 엘르, 다이나가 만드는 벽에 뒤를 맡기면 될 뿐이었다.

이는 그녀들도 마찬가지였다. 호흡이 거칠어질 것 같으면, 가름슈가 나가 병사들과 함께 만든 벽에 잠시 피하면 될 뿐이었다.

“마왕님, 저 저것은….”

디릭크가 놀라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는 것.

동족이 모두 제물로 바쳐져 넋이 나가, 멍하니 개미 여왕의 고삐만 잡고 있던 디릭크를 다시 움직이게 한 것.

다른 오크보다 확연하게 큰 오크였다.

슬라임에 먹혀버린 몸으로도 원래의 골격이 추측 가능할 정도로 두 다리와 허리로 이어지는 등이 넓었다.

“부족장님.”

그저 제 잘난 것만 이야기할 것 같은 디릭크가 자신은 오크들을 이끄는 리더가 아니라고 말하게 만든 자.

무례한 디릭크가 언급마저 조심하던 자.

사라졌던 오크 부족장이 그저 하수인이 되어, 부족을 멸망시킨 배신자의 수단이 되어 모습을 드러냈다.

“마왕님, 저는…. 제가 허락을.”

“좋다.”

“감사합니다.”

디릭크가 고삐를 놓았다.

아리아드를 호위하는 상급 나가 중의 하나가 디릭크에게 보관하고 있던 도끼를 돌려주었다.

디릭크가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분노조차 떠올리지 못한 채 그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하인아.”

“…. 아리아드님.”

“하인아, 너는 어찌 너를 다스리는 여왕을 잊었느냐? 네가 너에게 힘을 빌려줄지니, 그저 너는 나를 위한 봉사만을 생각하거라.”

나는 아리아드의 여왕님 놀이를 막지 않았다.

마왕성 앞 떡갈나무 줄기로 만든 부메랑은 놀이도구와 축복을 위한 제사용품으로 착각되곤 하지만, 엄연히 무기였다.

신성 우로보로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업적까지 이룬 무기였다.

거기다가 아리아드의 권능인 ‘순간이동’이 여전히 유효했다.

지하 유적 안이라서 그런지 마왕성 앞 떡갈나무 근처로 순간 이동하지 못하고, 지하 2층 출발 지점으로 순간 이동하긴 하지만, 위기에서 몸을 빼낸다는 의미는 달라지지 않았다.

도중에 부상병과 함께 순간이동으로 빠져도 좋지만, 아리아드 홀로 도망쳐도 좋았다.

“내가 도와주지.”

아리아드에게 축복과 위로를 받은 덕분에 회복한 라미아가 두 개의 정글도를 맞부딪혀 소리를 냈다.

신성을 향한 걸음을 걷고 있기에, 오크 요새 안에서 일어난 비극에 공명해 버린 라미아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리아드의 도움이 없었다면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실패한 배처럼 상태가 악화하였을 텐데, 도움 덕분에 신성을 향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라미아의 정글도가 하얗게 빛났다. 신성력에 기인한 권능이 펼쳐졌다.

늙은 오크의 검은 마기와 상반되는 힘이 보호막으로 전개되었다.

가장 먼저 아리아드에게 두껍고 강한 막이 형성되었다. 이어 자신과 디릭크에게 신성력을 머금은 둥글고 투명한 구가 씌워졌다.

정글도를 쥔 손을 크게 흔들자, 그 힘이 점과 점을 잇는 선처럼 일행에게서 일행에게로 이어졌다.

아나스타를 비롯한 일행에게도 이어진 선은 가름슈와 나가 병사들에게도 닿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건틀릿을 낀 손바닥을 펼쳤다.

나가 병사들 하나하나까지 보호막을 씌운 선은 흐릿한 점이 되어 나의 손바닥에 안착했다.

프르르-. 피시시-.

생선 가시 하나 정도를 막아낼 만한 보호막을 씌워주곤 사라졌다.

“….”

내가 라미아를 바라보자 라미아가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강하시니까, 보호막이 필요 없다고 생각해버렸습니다.”

***

아리아드가 라미아에게 탄 채로 부메랑을 손으로 붙잡고 빙글빙글 돌리며 달려 나갔다.

그 뒤를 디릭크가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따랐다.

링구아 오크 부족의 부족장이 오염되어 변해버린 몬스터.

디릭크가 존경을 표할 만큼 강했던 자라고 해도 불안하지 않았다.

아리아드는 몰라도 라미아는 진형을 갖출 줄 알고 협력하는 전투를 할 줄 알았다.

부족장 몬스터에게 전투를 걸고 주의를 끈 다음, 아군 쪽으로 슬금슬금 물러날 것이다.

위험하면 뒤로 빠져서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할 것이다.

디릭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저 욕심이 많은 평범한 놈일 뿐이었다.

남의 목숨보다는 자신의 목숨이 귀한 줄 알았다. 자신을 외면하고 자신 역시 외면했던 부족이지만, 억울하게 제물이 되어버리자 분노에 몸을 맡길 정도로 평범했다.

‘그리고 피가 식으면 안전하게 싸우려는 라미아의 지시에 따르겠지.’

복수보다 생존이 중요함을 아는 놈이었다.

나는 슬라임과 엉겨 붙은 오크 전사들과의 전투는 나를 따르는 이들에게 맡기고, 그 너머를 보았다.

긴 지팡이를 든 늙은 오크 주술사.

그 역시 검은 마기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네놈도 녹아내리는군. 아, 아니 처음부터 몸 일부는 슬라임이었나?”

“마왕 따위가 어찌 알까. 이 세상을 모두 녹여버리지 않으면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우습지도 않은데.”

“함께 하던 종족을 무의미하게 희생시킨 네가 희망이라.”

“그들은 희생이 아니라 토대가 되었을 뿐이다. 이 얽매인 곳에서 벗어나기 위한 토대.”

오크들이 제대로 된 집단전 능력을 보이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우리가 예상했던 주술사가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우리와의 전투보다 제물이 될 수 있는 조건을 지키라는 지시가 내려졌기 때문이다.

“나는 신성을 보았다. 세상을 녹이실 위대한 신성이시여, 그분을 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그분의 화신인 슬라임에게 몸의 절반을 바치고 지혜와 권능을 얻었다.”

늙은 주술사의 몸이 꿈틀거렸다.

그의 몸은 피 대신 슬라임을 흐르는 것만 같았다.

“이 세상은 신의 장난으로 흘러가는 세계. 그렇다면 신의 파편인 신성을 당연히 따라야 하지 아니할까.”

대지를 검게 오염시켰던 스타베팅 마기가 다시 그에게 모여들었다.

“나의 동족들은 제물로 희생된 것이 아니다. 그저 외부에서 온 자들, 방문자, 탐색자 혹은 유저라고도 불리는 자들에게 놀려지는 인형에서 벗어났을 뿐.”

나는 전투를 준비하며 피식 웃었다.

“늙은 주술사. 너, 후회하고 있군. 그렇게 열심히 변명하는 것을 보면.”

나는 늙은 주술사를 향해 달려들었다.